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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을 벗어나는 감상이었습니다. 허진호 감독의 신작이라는 말에 기대를 잔뜩 안고 극장에 들어갔는데, 나오면서 든 감정은 감동보다 찜찜함에 가까웠습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 잘 만든 영화인 건 분명한데 뭔가 중요한 걸 빠뜨린 느낌이었습니다. 그 '뭔가'가 뭔지 정리해 봤습니다.

음모론을 펼치는 방식, 이게 맞는 걸까요
중학교 학창시절 아주 친한 친구의 학용품이 나의 필통이나 가방에 가끔씩 들어있는 일이 일어나 당황을 넘어서 내가 훔친 것으로 의심 받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진상을 파헤쳐보니 우리 둘을 질투했던 또 다른 친구가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벌인 일이었습니다. 일을 벌인 친구도 우리와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이 그 때는 너무 당황스러웠던 경험이 영화를 보며 자꾸 떠올랐습니다.
영화는 실제 문세광 사건, 즉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대통령을 향해 총을 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합니다. 극 중 이름은 '문태광'으로 딱 한 글자만 바뀌었습니다. 영화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건 당시 발사된 총성의 횟수입니다. 목격자들은 여섯 발을 들었다고 증언하는데, 문태광의 5 연발 리볼버에서 나온 실탄은 네 발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두 발은 누가 쐈느냐, 이게 영화의 핵심 질문입니다.
여기서 제가 주목한 건 영화가 이 의문을 다루는 태도입니다. 탄도 분석, 목격자 증언, 현장 탄피 수거 과정의 불일치까지 꽤 촘촘하게 쌓아 올립니다. 탄도학(ballistics)이란 발사된 탄환이 어떤 경로로 날아가는지 분석하는 학문인데, 영화는 이걸 활용해 여고생이 쓰러진 위치가 문태광이 서 있던 자리에서는 총을 맞을 수 없는 각도라고 주장합니다. 꽤 설득력 있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까지 만입니다. 배후가 있다는 암시는 두 시간 내내 이어지지만, 그 얼굴은 끝까지 실루엣과 눈부신 빛으로만 처리됩니다. 철학자 칼 포퍼는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을 좋은 이론의 조건으로 꼽았습니다. 쉽게 말해 틀렸을 때 틀렸다고 검증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주장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얼굴 없는 음모론은 반박할 수가 없고, 그래서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관객 머릿속에 의심의 형태로 조용히 남을 뿐입니다.
| 목격자들이 들은 총성: 6발 문태광의 리볼버에서 발사된 실탄: 4발 (1발 불발, 나머지는 미설명) 영화가 제시하는 의문: 나머지 2발의 출처 영화가 제시하지 않는 것: 그 2발을 쏜 주체의 정체 |
허진호 감독의 장기, 그리고 역사왜곡의 경계
직접 극장에서 느낀 건 이겁니다. 허진호 감독은 정말로 사람 얼굴을 찍는 감독이라는 것. 1974년이라는 시대의 공기, 유해진이 연기한 파출소 순경 철구가 느끼는 혼란과 배신감, 그 감정이 화면에서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의 슬픔을 눈물 한 방울 없이 담아냈던 그 감독이 맞나 싶을 만큼, 인물 묘사만큼은 여전히 탁월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기가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발목을 잡습니다. 허진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가 결론에 도달하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역사적 사실보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감정적 진실을 담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시인의 진실', 즉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루는 방식이죠. 이 개념은 문학과 영화에서 창작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오래된 논거입니다.
문제는 관객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 재현된 시대 배경이 눈앞에 펼쳐지면 관객은 자연스럽게 이걸 역사적 사실로 읽습니다. 이건 제 경험상도 그렇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옆에 앉았던 분이 "실제로 공범이 있었던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영화가 의도했든 아니든, 확인되지 않은 의혹이 사실처럼 소비되고 있었습니다.
같은 제작사(하이브미디어코프)가 만든 《서울의 봄》과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합니다. 《서울의 봄》도 세부 사실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지만, 반란군들이 웃으며 찍은 기념사진이라는 실제 역사 기록으로 마무리하면서 범인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못 박았습니다. 12·12 군사반란은 법적으로 판결이 난 사안이라 같은 방식을 쓸 수는 없다는 점,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창작 가설과 역사적 사실의 경계를 분명히 했어야 합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결말, 감동인가 회피인가
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로 시작해서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끝납니다. 이 선언은 실제 역사적 사건입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이 중앙정보부의 편집국 개입을 거부하고 외부 간섭 없는 보도를 선언한 것으로, 이후 광고 탄압과 대량 해고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습니다(출처: 동아일보).
기자들의 용기가 숭고했다는 것, 저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 역사적 장면을 공범이 누구인지 밝히지 못한 결말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 사용합니다. 인물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천천히 보여주며 감정을 끌어올리는 연출은, 제가 직접 스크린 앞에 앉아서 느끼기에 상당히 작위적이었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만든 감독이 억제로 더 깊어지는 감정을 아는 분인데, 이 결말은 그것과 정반대 방향이었습니다.
비교 대상으로 올리버 스톤 감독의 《JFK》(1991)를 떠올려봤습니다. 이 영화는 케네디 암살의 배후에 거대한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한 지방검사 짐 개리슨의 이야기를 케빈 코스트너가 연기한 작품으로, 법정 최후 변론 장면에서 자신의 가설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전부 쏟아냅니다. 역사 왜곡 논란도 거셌지만, 그 파장으로 1992년 케네디 암살 관련 기록 전면 공개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습니다(출처: 미국 국가기록원(NARA)). 가설을 끝까지 밀어붙였기에 검증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검증이 실제 역사 기록을 열었습니다.
《암살자(들)》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한 방향을 가리키다가, 마지막 순간 감정의 언덕으로 슬쩍 올라타 버립니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리를 걸었던 1974년의 기자들을 기리는 영화가, 정작 자신의 주장에 대해서는 괄호 뒤로 숨는 셈입니다. 괄호라는 기호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말을 담는 용도입니다. 이 영화의 핵심 주장이 끝까지 그 괄호 안에 머물렀습니다.
결론
청량리역에는 1974년 8월 15일 끝내 박히지 못한 못이 하나 있습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식에서 대통령이 직접 박기로 했던 기념 못인데, 그날 오전 국립극장에서 총성이 울리면서 개통식은 침통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못은 반세기 동안 보관되다가 2024년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에서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우리말로 '못을 박는다'는 건 어떤 사실을 흔들림 없이 확정한다는 뜻입니다.
《암살자(들)》은 러닝타임 내내 망치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못을 박지 않았습니다. 만듦새는 훌륭하고 배우들은 저마다 제 몫 이상을 해냅니다. 그래도 제가 이 영화에 선뜻 박수를 보내기 어려운 이유는, 역사의 빈틈을 파고드는 용기를 내면서 정작 자신의 가설에는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함께 올리버 스톤의 《JFK》를 보시길 권합니다. 가설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비교하며 보시면 이 영화의 선택이 더 선명하게 보일 겁니다.
참고: 라이너의 컬처쇼크 (@rainermr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