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뭘 보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20년 넘게 구상하고 6년간 각본을 썼다는 《테넷》, 영화를 다 보고 드는 생각은 "이게 무슨 이야기지?"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장면을 되짚다 보니, 이 영화가 단순한 액션물이 아니라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영화와 마주하며 장면마다 사고의 확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설정이 결국 제가 오래 붙들고 있던 질문,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시간역행이라는 설정,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나요? 《테넷》 의 핵심은 인버전(Inversion)이라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인버전이란 물체나 사람의 엔트로피 흐름을 역전시켜 시간을 거꾸로 이동하게 만드는 ..
《덩케르크》는 전쟁 영화인데 적군이 없습니다. 전투도 없고, 영웅의 활약도 없습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전쟁 영화에서 기대하는 장면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관을 나오면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게 오히려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의 정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아챘습니다. 뺄셈의 미학 — 없애서 완성한 영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덩케르크》를 만들면서 대부분의 전쟁 영화가 필수로 갖추는 요소들을 하나씩 걷어냈습니다. 적군의 얼굴이 없고, 인물들의 전사(前史)가 없으며, 치열한 전투 장면도 없습니다. 여기서 전사란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배경 서사를 의미합니다. 보통 전쟁 영화라면 "고향에 약혼녀가 기다리고 있다"거나 "병든 어머니가 있다"는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