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로 한 행동이 오히려 자신의 삶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래도 그 선택을 했을까요. 스페인 영화 《미라지》는 바로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집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단순한 미스터리 스릴러로 접근했는데, 보고 나서 꽤 오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결말을 알고 다시 보니 초반 장면 하나하나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읽혔습니다. 나비효과 일반적으로 타임 루프나 시간 역행 영화는 주인공이 과거를 고쳐서 더 나은 현재를 얻는 구조로 흘러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봤을 때, 《미라지》는 그 공식을 완전히 뒤집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베라는 폭풍이 치던 밤, 이사 온 집에서 낡은 TV와 카메라를 발견합니다. 아무 테이프도 넣지 않았는데 화면이 켜지면서 25년 전의 장면이 흘러나옵니..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가해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화 《레블리지》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집니다. 자전거를 타고 평범하게 이동하던 남자가 부패한 경찰들에게 삥을 뜯기고, 사촌을 구하려 합법적인 절차를 밟을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오래전 억울했던 기억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게 꽤 불편할 만큼요. 공권력 남용, 절차가 막혔을 때 남는 건 영화 속 주인공 테리는 처음부터 싸우러 간 사람이 아닙니다. 갱단 사건의 핵심 증인이 된 사촌 동생이 시립 교도소로 이송되면 갱단의 보복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전에 보석(bail)으로 꺼내려 했을 뿐입니다. 보석이란 재판 전 피의자가 일정 금액을 법..
한때 잘 될 거라 확신했던 일이 어긋났을 때, 저는 실패보다 그 뒤에 찾아온 무기력이 더 무서웠습니다. 새로운 기회가 와도 선뜻 손을 뻗지 못하는 그 감각 말입니다. 영화 《라이프 리스트》를 보면서 알렉스의 이야기가 남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건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어릴 적 적어둔 꿈의 목록을 꺼내야만 했던 알렉스의 출발점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알렉스가 길을 잃은 진짜 이유 — 배경과 맥락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알렉스의 문제가 엄마의 투병과 죽음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표면일 뿐이었습니다. 알렉스가 삶의 방향을 잃은 근본 원인은 훨씬 이른 시점, 15살 무렵의 부모 이혼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빠와의 관계가 끊..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단순한 성공 서사로 생각했습니다. 석유로 부자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다 보고 나서 화면이 꺼진 뒤에도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플레인뷰가 원하는 걸 다 가졌는데 왜 그렇게 공허해 보였는지, 그게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거든요.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성공이 무엇을 파괴하는지를 소름 돋을 만큼 정밀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아메리칸드림, 빛과 그림자의 대칭 영화는 대사 한 마디 없이 시작됩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봉우리, 광활한 미국 땅, 그리고 그 땅 밑에 홀로 곡괭이를 휘두르는 다니엘 플레인뷰. 저는 이 오프닝 시퀀스를 처음 봤을 때 꽤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말이 없는데도 뭔가를 강하게 전달받는 느낌이었거든요.여기서 시퀀스(seq..
솔직히 저는 냉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고 하면 으레 무겁고 어두울 거라 지레짐작하고 넘기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애플TV 영화 《메이데이》는 제 그 선입견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1987년 소련에 불시착한 미군 조종사 트로이가 전직 KGB 요원 닉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는 이야기인데, 보고 나서 한동안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뭔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불시착, 그리고 예상치 못한 만남 영화의 발단은 극비 정찰 임무에서 시작됩니다. 트로이는 SR-71 블랙버드(Blackbird)를 타고 소련의 신형 미사일 격납고를 촬영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여기서 SR-71 블랙버드란 냉전 시대 미국이 운용한 초음속 고고도 정찰기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높이 비행할 수 있는 항공기였습니..
새로운 일을 맡았을 때, 혹시 저처럼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한참 망설인 적 있으신가요. 넷플릭스 영화 《러브 앤 몬스터스》는 바로 그 망설임이 출발점인 영화입니다. 겁쟁이 소리를 듣던 조엘이 사랑하는 에이미를 찾아 지상으로 나서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저도 제 안의 회피 습관을 꽤 불편하게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앞에서 자꾸 멈췄던 조엘, 그리고 저 영화의 배경은 소행성 충돌을 막기 위해 쏘아 올린 로켓에서 유출된 화학 물질이 지구 생태계를 바꿔놓은 세계입니다. 곤충과 양서류가 거대 변이체(Mutant Creature)로 진화했고, 인류는 지하 벙커에 숨어 살아갑니다. 여기서 변이체란 외부 화학 자극에 의해 생물이 비정상적인 크기와 공격성을 갖게 된 개체를 의미합니다. 이 설정..
넷플릭스에서 SF 장르가 1위를 차지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라스트 하우스》를 봤습니다. 집의 문과 창문이 전부 잠겨버린 채 한 가족이 몇 년을 버텨내는 이야기인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살아남는 것과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같은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꽤 오래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가족생존: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설정이 만들어 내는 것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코로나에 감염되어 집 안에서 격리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가족이나 지인이 음식을 문 앞에 가져다주기도 했고, 병이 나으면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영화 속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외부와 단절되면서 평소 하던 일을 중단해야 했고, 당연하고 사소하게 생..
솔직히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뭘 보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20년 넘게 구상하고 6년간 각본을 썼다는 《테넷》, 영화를 다 보고 드는 생각은 "이게 무슨 이야기지?"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장면을 되짚다 보니, 이 영화가 단순한 액션물이 아니라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영화와 마주하며 장면마다 사고의 확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설정이 결국 제가 오래 붙들고 있던 질문,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시간역행이라는 설정,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나요? 《테넷》 의 핵심은 인버전(Inversion)이라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인버전이란 물체나 사람의 엔트로피 흐름을 역전시켜 시간을 거꾸로 이동하게 만드는 ..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깨워도 될까요? 영화 《패신저스》는 이 질문 하나로 2시간 내내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우주선 아발론호에서 홀로 깨어난 짐 프레스턴이 내리는 선택은, 사랑과 이기심의 경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보고 나서도 한동안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계속 곱씹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고독이 사람을 어디까지 밀어붙이는가 영화 초반, 짐은 5,000명이 잠든 우주선에서 혼자 깨어납니다. 목적지 홈스테드 2까지는 90년이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넓은 시설을 마음껏 쓰며 버티지만, 마음을 나눌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결국 그를 무너뜨립니다.혼자 살아남는 것과 타인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다릅니다.짐이 겪는 고독은 가볍게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넓은 우주선의 ..
영화 《더 코어》는 지구 자기장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인류가 전례 없는 위기에 빠진다는 설정으로 출발하는 작품입니다.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는 이상 현상과 전자기기의 오작동은 일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과학자들은 지구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 중심부로 향하는 위험한 탐사를 계획합니다. 처음에는 지구 핵까지 내려간다는 설정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과학적 상상력뿐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거대한 재난을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결합해야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협력은 단순히 힘을 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