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로 한 행동이 오히려 자신의 삶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다면, 그래도 그 선택을 했을까요. 스페인 영화 《미라지》는 바로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집니다. 처음 봤을 때 저는 단순한 미스터리 스릴러로 접근했는데, 보고 나서 꽤 오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결말을 알고 다시 보니 초반 장면 하나하나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읽혔습니다. 나비효과 일반적으로 타임 루프나 시간 역행 영화는 주인공이 과거를 고쳐서 더 나은 현재를 얻는 구조로 흘러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봤을 때, 《미라지》는 그 공식을 완전히 뒤집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베라는 폭풍이 치던 밤, 이사 온 집에서 낡은 TV와 카메라를 발견합니다. 아무 테이프도 넣지 않았는데 화면이 켜지면서 25년 전의 장면이 흘러나옵니..
넷플릭스에서 별 기대 없이 틀었다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습니다. 2021년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어웨이크》는 전 세계 사람들이 갑자기 잠을 잘 수 없게 된다는 설정 하나로 사회 전체가 무너지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잠이 사라지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지, 제가 직접 겪어본 수면 부족의 경험과 겹쳐보니 생각보다 훨씬 소름이 돋았습니다. 수면 부족이 실제로 얼마나 무서운가 업무가 몰렸던 시기에 사흘 정도 평균 세 시간씩 자면서 출퇴근을 반복한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하루는 그냥 피곤한 수준이었는데, 이틀이 넘어가자 이메일 한 통을 읽는 데도 두세 번 다시 읽어야 했고, 동료가 말하는 중간에 무슨 맥락인지 놓치는 일이 계속 생겼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제..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가해자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화 《레블리지》는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집니다. 자전거를 타고 평범하게 이동하던 남자가 부패한 경찰들에게 삥을 뜯기고, 사촌을 구하려 합법적인 절차를 밟을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오래전 억울했던 기억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게 꽤 불편할 만큼요. 공권력 남용, 절차가 막혔을 때 남는 건 영화 속 주인공 테리는 처음부터 싸우러 간 사람이 아닙니다. 갱단 사건의 핵심 증인이 된 사촌 동생이 시립 교도소로 이송되면 갱단의 보복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전에 보석(bail)으로 꺼내려 했을 뿐입니다. 보석이란 재판 전 피의자가 일정 금액을 법..
한때 잘 될 거라 확신했던 일이 어긋났을 때, 저는 실패보다 그 뒤에 찾아온 무기력이 더 무서웠습니다. 새로운 기회가 와도 선뜻 손을 뻗지 못하는 그 감각 말입니다. 영화 《라이프 리스트》를 보면서 알렉스의 이야기가 남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건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어릴 적 적어둔 꿈의 목록을 꺼내야만 했던 알렉스의 출발점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된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알렉스가 길을 잃은 진짜 이유 — 배경과 맥락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알렉스의 문제가 엄마의 투병과 죽음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그것은 표면일 뿐이었습니다. 알렉스가 삶의 방향을 잃은 근본 원인은 훨씬 이른 시점, 15살 무렵의 부모 이혼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빠와의 관계가 끊..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단순한 성공 서사로 생각했습니다. 석유로 부자가 된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다 보고 나서 화면이 꺼진 뒤에도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플레인뷰가 원하는 걸 다 가졌는데 왜 그렇게 공허해 보였는지, 그게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거든요.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성공이 무엇을 파괴하는지를 소름 돋을 만큼 정밀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아메리칸드림, 빛과 그림자의 대칭 영화는 대사 한 마디 없이 시작됩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봉우리, 광활한 미국 땅, 그리고 그 땅 밑에 홀로 곡괭이를 휘두르는 다니엘 플레인뷰. 저는 이 오프닝 시퀀스를 처음 봤을 때 꽤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말이 없는데도 뭔가를 강하게 전달받는 느낌이었거든요.여기서 시퀀스(seq..
솔직히 저는 냉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고 하면 으레 무겁고 어두울 거라 지레짐작하고 넘기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애플TV 영화 《메이데이》는 제 그 선입견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1987년 소련에 불시착한 미군 조종사 트로이가 전직 KGB 요원 닉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는 이야기인데, 보고 나서 한동안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뭔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불시착, 그리고 예상치 못한 만남 영화의 발단은 극비 정찰 임무에서 시작됩니다. 트로이는 SR-71 블랙버드(Blackbird)를 타고 소련의 신형 미사일 격납고를 촬영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여기서 SR-71 블랙버드란 냉전 시대 미국이 운용한 초음속 고고도 정찰기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높이 비행할 수 있는 항공기였습니..
새로운 일을 맡았을 때, 혹시 저처럼 '내가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한참 망설인 적 있으신가요. 넷플릭스 영화 《러브 앤 몬스터스》는 바로 그 망설임이 출발점인 영화입니다. 겁쟁이 소리를 듣던 조엘이 사랑하는 에이미를 찾아 지상으로 나서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저도 제 안의 회피 습관을 꽤 불편하게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두려움 앞에서 자꾸 멈췄던 조엘, 그리고 저 영화의 배경은 소행성 충돌을 막기 위해 쏘아 올린 로켓에서 유출된 화학 물질이 지구 생태계를 바꿔놓은 세계입니다. 곤충과 양서류가 거대 변이체(Mutant Creature)로 진화했고, 인류는 지하 벙커에 숨어 살아갑니다. 여기서 변이체란 외부 화학 자극에 의해 생물이 비정상적인 크기와 공격성을 갖게 된 개체를 의미합니다. 이 설정..
넷플릭스에서 SF 장르가 1위를 차지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라스트 하우스》를 봤습니다. 집의 문과 창문이 전부 잠겨버린 채 한 가족이 몇 년을 버텨내는 이야기인데, 다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살아남는 것과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같은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꽤 오래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입니다. 가족생존: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설정이 만들어 내는 것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코로나에 감염되어 집 안에서 격리 생활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가족이나 지인이 음식을 문 앞에 가져다주기도 했고, 병이 나으면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영화 속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외부와 단절되면서 평소 하던 일을 중단해야 했고, 당연하고 사소하게 생..
폭포 옆에서 살면 소리를 질러도 괜찮다는 걸 알면서도, 애벗 가족은 왜 거기로 이사하지 않았을까요.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저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따져볼수록, 그게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는 게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폭포 옆이 안전해 보이는 이유, 그리고 실제로는 영화 중반부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폭포 소리가 더 크면 우리 소리가 안 들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걸 보고 저는 솔직히 예상과 달랐습니다. 단순히 무서워서 숨어 사는 게 아니라, 가족들도 이미 소음 환경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었던 거니까요.데스 에인절이 소리로 대상을 감지하는 에코로케이션(Echolocation)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정이 핵심입니다. 여기서 에코로케이션이란 자신이 발사한 음파가 물체에 반사되..
이 좀비 영화를 감상한 후 가족 생각이 났다면, 그게 정상입니다. 영화 《카고》는 살아남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무언가를 지키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처음엔 단순한 장르 영화라고 생각하고 틀었다가, 결말 이후에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공포보다 먹먹함이 더 오래 남는 작품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 직접 보고 나서야 이해했습니다. 좀비 영화의 문법을 일부러 비튼 배경 2017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호주 영화 《카고》는 단편 영화를 장편으로 확장한 작품입니다. 감독 벤 하울링과 욜란다 람케는 의도적으로 장르의 관습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좀비 영화에서 흔히 기대하는 집단적 공포, 압도적인 속도감, 폭발적인 위협 구도를 전부 덜어냈습니다.영화의 설정 자체가 독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