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배경 영화는 그냥 스펙터클 위주라고 생각했습니다. 폭발하고, 뭔가 날아오고, 주인공이 기적적으로 살아남는 공식 말이죠. 그런데 《그래비티》를 보고 나서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 영화는 우주에서의 사고를 다루면서도, 결국 한 사람이 삶을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우주 고립 — 지구가 보이는데 돌아갈 수 없다는 것 2013년 개봉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는 허블 우주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 수리 임무를 위해 파견된 나사(NASA) 직원들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허블 우주망원경이란 지구 저궤도 약 547km 상공에서 우주를 관측하는 대형 광학 망원경으로, 1990년 발사 이후 여러 차례 우주인들이 직접 수리해 온 시설입니다.나사에..
2017년 영화 《라이프》를 보면서 처음엔 그냥 우주판 에이리언이겠거니 했는데, 보다 보니 자꾸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실수를 한 적 있는데." 화성 토양에서 발견한 외계 생명체 켈빈이 연구진의 예상을 하나씩 뒤집어 가는 과정이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내가 충분히 안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켈빈이 보여주는 것: 생존본능과 적응력의 실체 영화 속 외계 생명체 켈빈은 처음 발견 당시 단세포에 가까운 비활성 상태였습니다. 생물학자 휴가 온도 조절, 대기 조성 변경 등 다양한 환경 조건을 적용한 끝에 마침내 지구형 대기 환경에서 깨어나는데, 활성화 이후 불과 12일 만에 눈에 띄게 성장한 상태가 됩니다.연구진이 켈빈에 대해 처음 파악한 가장 ..
뒤늦게 영화 《터미널을 다시 봤습니다. 솔직히 처음 볼 때는 그냥 톰 행크스가 공항에서 버티는 코미디 정도로 넘겼는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버텼던 제 첫 달이 자꾸 겹쳐 보이면서 한 장면도 가볍게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보다 그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이 생각보다 묵직하게 남았습니다. 공항 생존기,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일까 영화 《터미널》은 완전히 스필버그가 만들어낸 허구처럼 보이지만, 사실 실존 인물에서 출발합니다. 이란 출신 메르 한 카리미 나세리는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CDG)에서 무려 18년간 실제로 생활했습니다. 여기서 CDG란 파리 외곽에 위치한 프랑스 최대 국제공항으로, 나세리는 1988년부터 2006년까지 이곳..
낯선 사람의 친절이 공포가 될 수 있다는 걸, 영화를 보고 나서야 제대로 실감했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정점은 산악 생존 스릴러처럼 포장돼 있지만, 실제로 파고드는 건 인간의 심리입니다. 연인을 잃은 죄책감을 안고 다시 산을 찾은 사샤(샤를리즈 테론)가 벤(페런 에저트)이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하게 공감했던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죄책감과 친절의 공포 — 벤은 왜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포식자형 범죄자 연구에서 자주 언급되는 개념이 '타깃 선정(target selection)'입니다. 여기서 타깃 선정이란 범죄자가 무작위로 피해자를 고르는 게 아니라, 심리적 취약성이 드러나는 신호를 먼저 읽고 접근 대상을 고른다는 개념입니다. 영화 속 벤의 행..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래도 곁에 있는 것이 맞을까요. 《스파이더맨: 브랜뉴데이》를 보고 나서 제가 한참을 앉아 고민했던 것은 그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화려한 멀티버스 사건도, 새 빌런의 등장도 아니라 피터 파커라는 한 사람이 고립 속에서 무너져 가는 과정이 너무 현실적으로 느껴졌거든요. 중년의 나이에 이 영화로부터 건진 것들을 솔직하게 풀어봅니다. 고립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 — 피터의 선택과 그 대가 영화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직후로부터 4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피터 파커는 스콜피온, 툼스톤, 렘로드, 부메랑, 타란튜라, 핸드 같은 빌런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뉴욕의 범죄율을 80%나 낮춰 놓았죠. 스파이더맨으로서는 완벽한 4년이었습니다.문제는 가면 뒤에 있었습..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영화를 보면서 한 번에 이해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디세이」는 달랐습니다. 사전에 그리스 로마 신화 배경을 조금 공부하고 들어갔더니, 2시간 내내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제 옆자리에 앉은 분이 영화가 끝나자마자 "하나도 모르겠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한마디가 이 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트로이 전쟁, 역사인가 신화인가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받은 첫 번째 질문이 "이거 역사야, 신화야?"였습니다. 제가 직접 공부해 봤는데, 이 질문은 생각보다 답하기 까다롭습니다.트로이 전쟁의 서사는 기원전 8세기경 호메로스(Homeros)가 쓴 서사시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서사시(Epic Poetry)..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외계인 액션 블록버스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전혀 다른 영화였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2005년작 《우주전쟁》은 외계인보다 인간 자체를 더 무섭게 그린 영화입니다. 갑작스러운 재난 앞에서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빠르게 무너지는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어떤 심리로 움직이는지를 제가 직접 경험한 순간들과 겹쳐 읽게 됐습니다. 땅속에서 올라온 트라이포드, 그리고 재난의 구조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하늘에서 번개가 반복적으로 내리치고, 레이가 도착한 자리엔 연기와 함께 도로에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그리고 땅이 갈라지며 거대한 기체, 트라이포드(Tripod)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트라이포드란 세 개의 다리로 이동하는 외계 전투 기계로, 영화의 원작인 H.G. 웰스의 18..
예전에 가족 중 한 명이 갑자기 오랫동안 집을 비웠던 적이 있습니다. 대단한 사건도 아니었는데 집 안이 이상하게 조용해졌고, 그때 처음으로 '같이 있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영화 《한란을 보고 나서 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1948년 제주도, 평범하게 살던 한 가족이 국가 권력의 폭력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고 또 어떻게 버텼는지를 이 영화는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역사적 고증 — 영화 속 장면이 실제 기록과 얼마나 맞닿아 있을까요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7년에 걸쳐 이어진 비극입니다. 당시 제주 인구 약 30만 명 중 3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이 수치는 단순한 '사건'이라는 단어로는 담기 어렵습니다. 제주 4·..
《그린 북을 오락 영화 정도로 생각하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가 이렇게 마음에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1962년 미국 남부를 달리는 차 안에서 전혀 다른 두 남자가 서로의 편견을 조금씩 허물어 가는 이야기인데, 보는 내내 제가 살아오면서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했던 순간들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토니와 셜리, 이 둘이 함께 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1962년 뉴욕의 나이트클럽. 토니 발레롱 가는 특유의 화끈한 입담과 주먹으로 클럽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클럽이 신고를 당해 임시 휴업에 들어가면서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해집니다. 핫도그 빨리 먹기 내기까지 뛰어들 만큼 사정이 급했던 그가, 지인 소개로 운전기사 면접을 보러 갑니다.그런데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흑인입니다. 토..
메이저리그 역사상 아메리칸리그 최초 20연승 기록은 2002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세웠습니다. 넉넉한 자금도, 스타 선수도 없었던 팀이 세운 기록입니다. 영화 《머니볼을 보고 난 후이건 예상과 다른 분위기의 스토리였습니다. 야구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보고 나니 제가 직장에서 겪었던 평가와 편견에 대한 이야기처럼 느껴졌거든요. 세이버메트릭스, 야구를 숫자로 다시 쓰다 영화의 출발점은 단순합니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뉴욕 양키스의 3분의 1도 안 되는 연봉 예산으로 경쟁해야 했습니다. 단장 빌리 빈은 기존 스카우트 방식으로는 답이 없다고 판단했고, 예일대 경제학과 출신의 피터 브랜드를 영입해 전혀 다른 접근법을 시도합니다.그 방법이 바로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입니다. 세이버메트릭스란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