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뭘 보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20년 넘게 구상하고 6년간 각본을 썼다는 《테넷》, 영화를 다 보고 드는 생각은 "이게 무슨 이야기지?"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장면을 되짚다 보니, 이 영화가 단순한 액션물이 아니라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영화와 마주하며 장면마다 사고의 확장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설정이 결국 제가 오래 붙들고 있던 질문,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와 맞닿아 있었습니다. 시간역행이라는 설정,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나요? 《테넷》 의 핵심은 인버전(Inversion)이라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인버전이란 물체나 사람의 엔트로피 흐름을 역전시켜 시간을 거꾸로 이동하게 만드는 ..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깨워도 될까요? 영화 《패신저스》는 이 질문 하나로 2시간 내내 저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우주선 아발론호에서 홀로 깨어난 짐 프레스턴이 내리는 선택은, 사랑과 이기심의 경계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줍니다. 보고 나서도 한동안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계속 곱씹게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고독이 사람을 어디까지 밀어붙이는가 영화 초반, 짐은 5,000명이 잠든 우주선에서 혼자 깨어납니다. 목적지 홈스테드 2까지는 90년이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넓은 시설을 마음껏 쓰며 버티지만, 마음을 나눌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결국 그를 무너뜨립니다.혼자 살아남는 것과 타인의 삶을 선택하는 것은 다릅니다.짐이 겪는 고독은 가볍게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넓은 우주선의 ..
영화 《더 코어》는 지구 자기장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인류가 전례 없는 위기에 빠진다는 설정으로 출발하는 작품입니다. 지구 곳곳에서 발생하는 이상 현상과 전자기기의 오작동은 일상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과학자들은 지구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 중심부로 향하는 위험한 탐사를 계획합니다. 처음에는 지구 핵까지 내려간다는 설정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과학적 상상력뿐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거대한 재난을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결합해야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협력은 단순히 힘을 합..
아이가 납치되었다는 전화를 받은 부모가 그 아이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태도를 바꾼다면, 그 행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영화 《짐승들》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권력의 위선을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납치극이라는 긴박한 상황을 중심으로 정치적 야망, 인종적 편견, 가족의 갈등, 도덕적 책임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단순히 누가 범죄를 저질렀는지가 아니라, 각 인물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납치극의 구조 — 돈과 권력이 만든 함정 영화의 주인공 마크는 로스앤젤레스 시장 선거를 앞두고 당선에 집착하는 정치인입니다. 경쟁 후보에게 뒤처진 그는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 선거 자금을 마련하지만, 이러한 사..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한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영양사로 일하던 직장 생활 초반에 제가 만든 특식메뉴 보고서를 자신의 성과인 것처럼 포장한 동료때문에 오랫동안 분노를 삭이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감정을 꺼낸 채로 영화 《벤허》를 봤는데, 스크린 속 벤허의 이야기가 남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1880년 남북전쟁의 영웅 루 월리스 장군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1907년 무성 영화를 시작으로 2016년까지 총 네 번 리메이크된 고전 중의 고전. 그 완결판이 과연 복수 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 봤습니다. 배신의 시작 — 형제보다 진했던 우정이 어떻게 무너졌을까혹시 오래 알아온 사람에게 배신당했을 때, 그 사람이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라고 느껴본 ..
솔직히 저는 이 영화가 공포 영화인 줄 알고 들어갔습니다. 마케팅에서 계속 "무서운 영화"로 밀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공포보다는 스릴러에 훨씬 가까운 작품이었고, 그 간극이 생각보다 꽤 컸습니다. 영화 《눈동자》는 공포스러운 분위기와 미스터리 스릴러의 수사 구조를 결합한 작품입니다. 2026년 6월 24일 개봉한 이 영화는 쌍둥이 동생 서인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파헤치는 서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장면과 강렬한 플래시,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초반부터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러나 영화를 감상하면서 인상적인 시각적 연출과 별개로 장르의 방향성과 이야기의 개연성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공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스릴러였던 이유일반..
영화를 감상하고 든 감정이 슬픔이 아니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이 직접 법정에 서서 몸에 새겨진 흉터를 보여주며 "내가 바로 증거"라고 말하는 장면 앞에서, 저는 과거에 부당한 일을 겪고도 그냥 묻어버렸던 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이 글은 단순한 영화 감상이 아닙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그 질문을 붙들고 쓴 기록입니다. 위안부 증언이 지금도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 예전에 위탁급식업체에서 일할 때 급식소 거래를 성사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성사된 거래를 윗사람이 본인 실적으로 만들었던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를 떠올렸습니다. 너무 분하고 억울했지만 평화롭게 직장생활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항변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침묵이 현명한 선택처럼 느껴졌고, 시간..
《덩케르크》는 전쟁 영화인데 적군이 없습니다. 전투도 없고, 영웅의 활약도 없습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솔직히 당황했습니다. 전쟁 영화에서 기대하는 장면들이 하나도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관을 나오면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게 오히려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의 정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아챘습니다. 뺄셈의 미학 — 없애서 완성한 영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덩케르크》를 만들면서 대부분의 전쟁 영화가 필수로 갖추는 요소들을 하나씩 걷어냈습니다. 적군의 얼굴이 없고, 인물들의 전사(前史)가 없으며, 치열한 전투 장면도 없습니다. 여기서 전사란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배경 서사를 의미합니다. 보통 전쟁 영화라면 "고향에 약혼녀가 기다리고 있다"거나 "병든 어머니가 있다"는 식..
예상을 벗어나는 감상이었습니다. 허진호 감독의 신작이라는 말에 기대를 잔뜩 안고 극장에 들어갔는데, 나오면서 든 감정은 감동보다 찜찜함에 가까웠습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 잘 만든 영화인 건 분명한데 뭔가 중요한 걸 빠뜨린 느낌이었습니다. 그 '뭔가'가 뭔지 정리해 봤습니다. 음모론을 펼치는 방식, 이게 맞는 걸까요 중학교 학창시절 아주 친한 친구의 학용품이 나의 필통이나 가방에 가끔씩 들어있는 일이 일어나 당황을 넘어서 내가 훔친 것으로 의심 받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진상을 파헤쳐보니 우리 둘을 질투했던 또 다른 친구가 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벌인 일이었습니다. 일을 벌인 친구도 우리와 친한 친구였다는 사실이 그 때는 너무 당황스러웠던..
"눈을 가리면 살 수 있다"는 설정이 너무 단순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버드 박스》를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 영화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를 담은 이야기였습니다. 아이를 원하지 않던 한 여자가 재난 속에서 두 아이를 목숨 걸고 지키는 엄마로 바뀌는 과정이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게 와닿았습니다. 시각 차단이 만드는 공포 — 익숙한 것이 가장 낯설어지는 순간 밤에 갑자기 정전이 되어 집 안이 완전히 어두워진 순간이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눈 감고도 걸어 다니던 제 집인데, 그 순간만큼은 손으로 벽을 더듬으면서 겨우 몇 발자국 움직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물건 하나에 발이 걸려도 심장이 쿵 내려앉고, 휴대전화 불빛을..